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19세기말 한국의 풍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우리에겐 별 문제될 것도 없는 일상적인 것들이 매우 신기했나 보다. 농촌마을 어디를 가든 대낮임에도 술에 취해 나가 떨어져 있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벌건 대낮에 술 취한 것도 이상했지만, 술 취한 그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관대한 태도 역시도 이 책에서는 색다른 풍경으로 그리고 있다.
술(酒), 적당하면 약주(藥酒)요 과하면 독주(毒酒)다. 잘 쓰면 영약(靈藥)이고, 잘못 쓰면 사약(死藥)이 되는 게 술이다.
원래 술을 뜻하는 글자는 주(酒)가 아니라 지금은 닭의 의미로 쓰는 유(酉)였다. 유는 끝이 뾰족한 술독 모양의 상형문자이다. 신석기인들이 즐겨 쓰던 빗살무늬 토기처럼 끝이 뾰족한 것은 황하유역의 진흙에 술독을 묻어두고 사용했음을 뜻한다.
술독을 뜻하던 상형문자 유가 어느 순간 12간지의 닭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술은 삼수변(氵)이 보태져서 주(酒)가 됐다. 그러나 원래 술을 뜻하던 유자가 들어간 글자는 대개 신께 제사하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제사지낸다’는 뜻의 전(奠)이 그렇고, ‘존중한다’는 뜻의 존(尊)도 그렇다.
‘진한 술’을 뜻하는 순(醇)도 본래는 술(酉)로 ‘제사지낸다’는 향(享)의 합성자이고, ‘가혹하다’ ‘지나치다’ 할 때의 혹(酷)도 ‘독한 술’(酉)로 신께 고(告)한다는 뜻이고, ‘달다’ ‘감미롭다’는 뜻의 례(醴)도 ‘단술’(酉)로 ‘신께 제사지낸다’는 례(豊, 禮의 古字)와 결합된 글자이다.
이렇듯 술은 신께 제사지내는 성수였고, 제사 후 술을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은 최고의 성찬이었다. 제사의 마지막 단계 음복이 제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복이자 영광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참여한 자들의 태도가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폭음하지 않고 적당하게 마셨으니 약주요 경건하게 마셨으니 저절로 영약이 된 셈이다.
그러나 복(福)도 지나치면 화(禍)가 되던가?
역사속의 술로 인한 재앙은 수도 없다. 오죽하면 고대 중국의 정치를 한눈에 보여주는 『상서』에 주화(酒禍)를 경계하는 「주고(酒誥)」편이 있을까?
하(夏)나라 걸왕(桀王)은 전국에서 선발된 미녀 3천명이 추는 군무(群舞)와 미주(美酒)에 취해 민심이 떠나는 것도 몰랐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성어는 이 때 나왔다. 궁궐 연못에 향긋한 미주를 채워 주지(酒池)를 만들고, 연못 주변 나뭇가지에 육포(肉脯)를 걸어놓아 육림(肉林)을 만들어 진탕 즐기다 망국의 군주가 된 것이다.
민심(民心)이 떠나면 천심(天心)도 잃는 법. 걸왕은 주지육림에 빠져서 민심을 잃고 망국의 군주가 됐다. 젯상의 술이 천심을 달래지만, 그 술이 민심을 잃게 하고 천심을 떠나게 한다는 것이다.
요즘 술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특히 개인이든 공인이든 술로 인한 재앙은 가볍지 않다. 그간 주화(酒禍)로 인한 심각한 문제를 숫하게 경험하였으면서도 여전히 단속되지 않음은 아마도 비숍의 지적처럼 술에 관대한 전통 때문이 아닐까?
접대에 음주는 필수이고, 음주에 취함은 당연이란 생각이 주화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거기다 만취 후의 비정상적 행위를 관대하게 보아 넘기던 통념은 잘못된 음주문화를 양산한 가장 큰 주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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