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이 다가오면서 복잡한 도시에서 분주한 일상을 살던 이들의 눈길이 한적한 곳을 향한다. 더욱이 직장인들의 경우에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어떤 시인의 말처럼 ‘금요일에 먼 데를 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꼭 여름이 아니더라도 꽉 짜여진 삶 속에서 탈진한 이들은 그 꽉 짜여진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한다. 당연한 일이다. 쉼 없이 어찌 그 삶이 생기발랄할 수 있겠는가. 활기찬 노동을 위해 휴식은 꼭 필요하다. 우리가 쉬지 않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몸속의 심장조차 쿵쿵대며 뛰는 그 사이사이에 휴식을 취한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최근 불고 있는 웰빙(well-being) 바람은 휴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금요일’을 고대하게 만든다. 잘 쉬고 잘 먹으며, 잘 살자는 웰빙. 소위 삶의 질을 문제 삼는 그런 바람은 금요일에 시작되는 주말 휴가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으로 확대되는 느낌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잘 존재하기’는 특정한 시공간으로 축소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무슨 특정한 ‘장소’로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일상적 삶을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聖所)로 삼듯이, ‘잘 존재하는’ 삶을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 머무르더라도 잘 쉬고 잘 먹으며,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일상의 성화’(聖化)라 부른다.
나무 빗장 아래서 한가로움 꿈꾸지 않기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웰빙은 ‘이기적인’ 냄새가 짙게 풍긴다. 이기(利己)는 자기를 위(爲)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자기만’ 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섬조차 바닷물결이 철썩이고 있어서 존재하지 않던가. 최근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웰빙에 ‘자기 상실’의 두려움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된다. 심화되는 환경 위기에 대한 두려움, 건강을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상실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심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자기 방어의 심리적 근저에 자기 상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모든 두려움이 그렇지만, 자기 상실의 두려움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상실의 두려움 속에서 움츠러든다면, 그것은 ‘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의 소통을 두려워하는 자폐증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듯, 자신만 잘 살기 위해서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은 일종의 병적 태도인 것이다.
그렇다고 꽉 짜여진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누리는 것을 병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서슬에 지쳤을 때 고독한 공간에서 은거할 필요가 있다. 예수 같은 분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더러 슬그머니 산 속으로 들어가 홀로 계셨다는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산 속으로 은거했다고 해서 타자와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어 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에서 그분의 삶이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중국의 장자(莊子)도 ‘소인은 나무 빗장을 걸고 나서 한가로움을 누리고, 대인은 달빛 빗장을 걸고서 한가로움을 누린다’고 했다. 여기서 ‘달빛 빗장’이란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대인(大人)의 한가로움을 누리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데, 대인이 누리는 한가로움은 항상 세상과 타자를 향해 열려 있다는 말이다. 이런 태도는 자기 상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웰빙의 추구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즉 자기 상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웰빙의 추구는 ‘나무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한가로움을 누리려는 소인(小人)의 그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건강한 휴가, 건전한 웰빙에 대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더불어 충만해지려는 삶에 대한 갈망’이 동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한가로움을 누리는 소인의 그것이 자기 상실의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잘못된 동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공간을 찾아가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진정한 휴식 즉 진정한 삶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 쉴 만한 좋은 공간, 좋은 음식을 찾아 헤매는 결핍감에서 비롯된 행위는 결코 삶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 삶의 충만은 외적 결핍의 해소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을 뿐이다. 그래서 수도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결핍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라고 했다. 웰빙의 동기가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는 웰빙과 거리가 먼, 결핍의 수렁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존재가 충만하면 노동은 쉼이 된다
‘잘 존재하려고’할 때 자기 내면의 동기가 참으로 중요하다. 예컨대 휴식을 취하려고 여행을 떠나면서 힘에 겨울 정도로 뭔가를 배낭에 잔뜩 쑤셔 넣고 나서는 사람은 휴식은 커녕 여독(旅毒)만 안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충만은 자신을 채움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비움으로 얻어지는 역설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지난 겨울 네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객기에서 한국 대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느 선교 단체 소속으로 네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즐거웠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해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으나 생기에 넘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밝고 환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에겐 봉사 그 자체가 휴식이었겠구나!
나눔은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다. 땀 흘리는 봉사도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다. 그 내어주는 행위가 충만한 삶을 위한 동기에서 비롯될 때, 그것은 즐거움과 생기를 북돋워 준다. 비움의 행위이지만, 그것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어떤 행위 뒤에 존재의 충만에 이를 때, 그 행위 자체는 휴식이 된다. 땀을 쏟는 노동일지라도 그 노동 자체가 휴식이 된다. 그러므로 즐거운 노동은 휴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즐겁지 않은 노동은 휴식이 아니다. 만일 이 글을 쓰는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글쓰기를 하지 않고 단지 원고료 수입을 얻기 위해서 쓴다면, 나의 행위는 그냥 노동일 뿐이다. 농사짓는 이들이 뙤약볕 아래서 풀을 뽑을 때 그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단지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건 고단한 노동일 뿐이다. 그러나 그 일 자체에서 기쁨을 누린다면, 그 일은 휴식이 될 수도 있다.
그때 노동과 휴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옛 교부들은 기도와 노동, 명상과 노동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 둘을 나누어 보게 된 것은, 노동을 자본의 획득으로 보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대인들은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에서 더 이상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노동 자체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의 멍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더라도, 때로 그것에서 벗어나 일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우리가 하는 일이 휴식이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의 심장은 늘 일하는 것 같으면서도 틈틈이 쉬고, 틈틈이 쉬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몸에 새 피를 공급하는 일을 활기차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음을 아는 참 휴식으로
섬기는 삶의 모범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계신 예수는 심장처럼 일하셨다. 그리고 심장처럼 쉬셨다. 일하지 않는 듯 일하고, 쉬지 않는 듯 휴식을 취하셨던 예수에게서 우리는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가 삶에 대한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때 가능해진다. 일은 본래 고달픈 것이라는 생각, 일을 돈과 연결 짓는 태도, 일과 휴식을 무 자르듯이 분리해 대하는 자세, 일과 기도(혹 명상)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나아가 자기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섬김의 태도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훨씬 더 성숙한 존재로 여물어 갈 수 있다. 자기 상실을 두려워하면서 남을 섬길 수 없다. 사실상 자기 상실의 두려움은 ‘나’와 ‘나의 것’이 따로 있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바울처럼 ‘나는 이미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 있다’는 또렷한 자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잃어버릴까, 자신의 소유가 줄어들까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기꺼이 남을 위해 땀 흘리고, 자신이 지닌 것을 남에게 내어줄 수 있다. 아니, 자기가 땀 흘리고 내어주는 대상이 ‘남’이 아니고 곧 ‘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나서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예수의 발자취를 쫓는 자라면, 이런 삶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정말 ‘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만, 나의 가족만 위해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나와 남을 갈라놓고 파편화된 삶을 사는 현대인을 일컬어, 어떤 시인은 ‘모래 인간’이라고 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웰빙족 가운데 모래 인간들이 많이 있다. 모래 인간들만 북적이는 곳을 우리는 ‘사랑의 사막’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의 사막엔 ‘내가 있어 그대가 있을’ 뿐이다. 사랑의 사막엔 관계의 밀물 썰물이 드나들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는’(So Hum) 그런 세상을 우리는 바란다. 휴식(休息)은 문자 그대로 ‘숨의 멈춤’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휴식, 즉 숨의 멈춤을 지켜보면서 들숨과 날숨 사이에 살아 있는 ‘그대’(하나님)를 보아야 한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휴식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 그리고 내가 만나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이다. 그 모든 것들 없이 나는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도움 없이 나는 진정한 쉼을 얻지도 못한다. 이 놀라운 우주의 신비와 기적을 나는 오늘도 찬탄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