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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챠드 포스트의기도 2
2005-01-24 10:44:24   read : 1343

비잔틴의 신실한 작가 칼리스토스는 "쉬지 않는 기도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였다. 프랑크 라우바흐 는 말하기를 , "오, 이렇게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 하나님을 내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내 대화의 상대로 삼는 것이야말로 내가 일찍이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부단히 연습하는 동안 다른 모든 것은 중단하게 된다. 우리는 점차 삶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마음이 집중되며, 또한 차츰 관점이 모아지게 된다. 점점 더 우리는 일상 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우리 자신조차 놀랄 만큼 수월하고 차분하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기도하는 것보다 간헐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오랜 만에 한 번씩 칠 때 좋은 테니스 경기를 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정하지 못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마음과 뜻과 영혼이 모아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는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신의 기도를 하면서 누군가가 모세처럼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과연 믿는가? 아니다. 규칙적으로 관련을 맺을 때 친밀도가 향상된다. 수월성도 역시 발전된다. 왜 수얼해지는가? 그 이유는 의의 습관을 점점 쌓아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거룩한 습관들'이 통합되는 역사가 일어나 기도가 쉽고 자연스럽게 자발적이 되며,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이다.
불타는 열정
이 시대에는 쉬지 않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흩어진 마음들과 떠들썩한 마음으로 끝없이 연속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숨이 차게 된다.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해지며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아무런 까닭 없이 마음속에서 생각이 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이 잘 안된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실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들이다.
쉬지 않는 기도 혼돈된 가운데서도 평화를 말해 주는 면이 있다.
윌리암 제임스는 "종교는 무딘 습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은 열정으로 존재한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이러한 생활을 갈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능력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확신컨대 여기 저기서 조금씩 드린 기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지 않다. 때문에 더 원해야만하며 훨씬 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 당신은 영원한 기도의 제단에 꺼지지 않는 헌신의 불꽃을 태우기를 원할 것이다.
단숨의 기도
단숨의 기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 기도'로서 그 내용은 "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것이다. 단숨의 기도는 창조되기보다는 발견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에 당신이 당신 자신의 힘으로 단숨의 기도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선택해서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사라의 임재를 묵상해 보라. 단숨의 기도는 가능한 자주 드려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당신의 영혼 속 깊이 심어 주시도록 맡기라, 너무 서두르거나 너무 빨리 기도를 바꾸지 말라.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기들처럼 계속해서 다툴 때, 이 싸움을 없애려면 마음을 단 한 가지 생각에만 고정시켜야 한다. 이 일을 돕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짧은 기도이다. 그 기도는 마음을 단순하게 그리고 집중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매일매일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기쁘게 해나가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를 속삭이듯이 기도로 올려 드리면 된다.
토마스 켈리 '우리의 중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삶은 서두르지 않는 평화와 능력의 삶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고요하며 놀랍다. 그것은 승리의 삶이며 빛나는 삶이다. 시간이 별도로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계획들을 새롭고 능력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떤가?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라.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분명히 이런 끊임없는 교제의 삶은 저절로 되거나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치있는 일은 언제나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신 일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출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능력의 역사에 붙들어매서 주님의 바람이 무한히 휩쓸고 지나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의 단계
그 첫 번째 단계는 외적 훈련의 단계이다. 능숙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지금은 그의 손이 건반 위에서 위아래로 날렵하게 움직이지만 그도 한때는 아주 간단한 연주기법을 가지고도 몹시 괴로워헀을 것이다. 프랑크 라우바프는 그것을 '분초와의 경기'라고 하였다. 우리도 그것을 즐거운 경기로 바꿀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얼마나 많은 순간을 거룩한 교제로 바꿀 수 있을까?
두 번째 단계는 이 일이 잠재 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적인 기도는 전혀 뜻밖의 순간에 흘러나온다. 교통이 막혔을 때 소나기가 올 때, 또는 사람이 북적대는 상점가 같은 곳에서 그런 기도가 나온다. 마침내 기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되면 우리 행동의 변화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교통이 혼잡해도 짜증이 덜 나고, 집안이나 회사의 사소한 문제거리들도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가 마음속에 박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성과 더불어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성과 이성이 보다 조화롭게 활동한다. 기도하는 일이 좀도 수월해지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며, 점저 더 자연스러워진다. 기도가 부담스럽기보다는 즐겁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의 결정은 좀더 사랑에 근거한 합리성에 기초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토에 대해 더 민감해진다. 방안에 들어서면 누가 슬프고 외로운지, 또 누가 깊고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 있는지 즉시 알아본다.
네 번째 단계는 기도가 전인격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기도가 숨쉬듯 자연스럽게 되고 피가 전신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기도가 우리 속에서 강렬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
즉 쉬지 않는 기도가 예수님이 금지하신 중언 부언하는 기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쉬지 않는 기도는 골방의 기도이며 은밀한 기도이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다만 아는 것은 우리가 이전보다 행복하고 더 충만하다는 사실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격상 실천적인 것에 가깝다. 우리의 감정이 영적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좋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분명히 영적이지 못할 때는 어떤가? 가령 자녀들과 반목하거나 부부가 불화할 때는 어떤가?
어리석게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며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처럼 가장하느니보다 차라리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께 잠시 동안 나가 계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여느 때처럼 은혜로우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 다시 시도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실패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다. 실패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문제는 오히려 일정 기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연습하여 습관으로 만드느냐그렇지 못하느냐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내주"를 경험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
12장 마음의 기도
마음의 기도는 친밀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어린아이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기도요, 애정이 깃든 기도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가 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싶다"
장 니꼴라 그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고,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바로 마음의 소리이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도 마음이다." 우리도 아주 오래 전의 요한 웨슬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성령
마음의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기도의 세 단계를 말하였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범주화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기도에 도달하게 되면 성령이 기도의 주도자가 되시는 수주에 이미 들어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해서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마음의 기도에 들어서면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는 쓰지만 그 표헌이 실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을 뿐이다. 성령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시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조지 저트릭의 말대로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존중하는 친구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과 가장 깊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면 "마치 태양 빛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는 고요한 연못의 물같이"된다
마음 기도의 다양한 표현
마음의 기도를 표현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만큼이나 무한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러한 역사를 너무 세심하게 분류하거나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주시는 특별 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레마'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저 '말'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레 불과하다.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말씀 속에 있는 특별한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말씀 속에 있는 어떤 특별한 구절이 개인의 상황에 새롭게 적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글로쏠라리아, 즉 방언은 마음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글로쏘라리아를 사용해야 할 이유와 용도는 많이 있다. 그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놓임을 받기 위함이다. 그것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영이 영을 감동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이성적인 것을 초월한다.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통하여 천상의 것들에 참여한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연악하고 더듬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은 때때로 '입신'이라고 지칭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는 체험으로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아경에 들어가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닥이나 마루에 조용히 눕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체험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된 것이 많다) 언제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체험의 결과로 영적 교제가 깊어지고 거룩한 사랑이 증가된다고 보고한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내적 치유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영혼의 기도는 그 시간 계속해서 진행된다.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 영과 통하는 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거룩한 웃음'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올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웃는 사람들이 술 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웃음, 진정한 기쁨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케 하며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어진다. 절대로 두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의 반응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들어와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너무나 두렵고 너무나 사랑으로 충만한 나머지 말이 안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브레넌 매닝이 말한 대로 '수용된 사랑의 지혜'를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의 장마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예상치 못했을 때 갑자기 쏟아 붓는 장마비와 같아서 당신을 경이로움과 찬양으로 몰아가고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게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우산을 펴서 당신 자신을 가리지 말라.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이 내리시는 사랑의 장마비를 흠뻑 맞도록 하라.
13장 묵상의 기도
묵상을 통해 진리가 입에서 머리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조용한 묵상, 즉 반추를 통해 그 사람속에서 믿음으로 충만한 사랑의 반응을 기도로 표현하게 된다.
조깅하는 수도사
당신은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겠다는 자세로 마음 문을 여세요, 하나님을 당신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말고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세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꼐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꼐서 친구처럼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듯했다.
성령께서는 치유의 사랑과 부드러운 손길로 짐이 가지고 있던 과거까지도 상한 감정들을 어루만져 주셨다. 자기 삶의 주권을 포기한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주권을 발견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묵상
성경 묵상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는 교만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마이아처럼 성경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서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수박 겉핥기식의 묵상은 우리의 내면 상태를 반영해준다. 그런 우리의 내면 상태는 변화되어야 한다.
상상력의 강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보다 간단하고 겸손한 이 방법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직접 가르치셨고, 비유 속에서도 계속해서 상상력을 강조하셨다. 수많은 신앙의 대가들도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르 격려한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묵상을 할 때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저는 마음소게 그리스도를 그리려고 애쓴답니다. 저는 이런 식의 일들을 많이 하곤 합니다. 제 영혼이 이런 방법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를 시작했거든요." 우리도 그녀의 말에 대부분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묵상할 떄 지적이고만 접근하려고 애써왔으며 그런 방법이 너무나 기게적이고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생각하려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며, 하나님의 진리와 길을 따르고자 애쓰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살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그만큼 더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력을 거룩하게 하셔서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꼐서는 그렇게 자신을 비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심상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켜 주신다.
성경을 체험하며 사는 법
묵상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의 뜻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시며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 말씀에 순종해댜 한다. 그것은 동양의 세속적인 명상의 결과와는 너무도 분명하게 구별된다.
풍성한 우물
근 오백년 동안 경건 문학의 독보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도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다. 이 책의 엄청난 인기는 그것이 오십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음에 큰 평안이 있는 사람은 칭찬이나 비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육체 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보다 우리의 약점을 이겨내는 것이 더 큰일이다." "모든 좋은 감정을 좇는 데 급히 서두르지 말고 모든 나쁜 감정을 피하는 데 너무 열심 내지 말라." "옛 뱀이 너희를 유혹하고 시험할지라도 기도로 그를 가두어 놓을 수 있고, 시험을 받는 동안 유익한 일을 그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신앙의 대가들이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일과 기도, 이 두 가지를 꿰맨 자국이 없는 하나의 옷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를 '무릎을 끊고' 기록했다고 선언하였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저술가로서의 자신의 천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자 그대로 사람이 아버지와 함께 살듯이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꼐 감사한다. 그리고 일하기 시작한다. 저녁이 되면 정해진 시간에 잠시 일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서 잠자리에 든다. 나는 늘 이렇게 살아간다." 기도로 충만한 그러한 독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해 하도록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묵상 기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음성을 체험하고자 하는 소망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묵상을 하고자 하는 소원과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저 묵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내 포기하게 된다. 묵상하고자 하는 소원과 묵상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절대적인 약속이다.
14장 무언의 기도
시리아의 수도사였던 니느웨의 이삭은 "수많은 말을 함으로써 기뻐하는 사람들은 비록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 속이 텅 비어 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훈련이다.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진다는 것은 점점 더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시편 기자는 선언한다. 그리고 성 안토니스의 제자였던 광야의 교부 암모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료하는지,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거슨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듯 다시금 살아가는 침묵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계할 일과 주의할 일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약병에 붙어 있는 주의 사항과 꽤 비슷한 경계의 말을 해야겠다. 무언의 기도는 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숙련의 정도나 전문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찬양의 기도나 묵상 기도나 중보 기도나 다른 수많은 종류의 기도들은 누구든지 다 자유로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언의 기도만큼은 다르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소중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놀랍고 두렵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침묵의 말씀에 귀기울일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C.S.루이스는 나는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무언의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도를 나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제 내 능력보다 더 큰 정신적, 영적 힘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의 기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숙한 믿음의 표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와, 개인적 희생이 크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만이 마음의 소원을 만족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확신과, 기도도에 대한 깊은 만족 등이다. 또 개인적인 능력과 단점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와, 영적인 성취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자유함과, 생의 요구들을 끈기 있고 지혜롭게 처리해 낼 수 있는 입증된 능력 따위를 들 수 있다.
당신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하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점점 덜 두려워하고 있는가? "기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느가? 지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가? 건설적인 비판을 점점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개인적인 모욕에 대해 구애받지 않으며,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기를 배우고 있는가?' 말없이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영적인 세계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서는 말이 뒷전으로 물러가고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각각의 경우 감정적인 언어를 주목해 보라. 이런 종류의 기도는 분명히 이성적인 경험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해당된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무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청종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감정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나님에 의해 훈련될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변할 수 있다. 무언의 기도는 신앙 생활에 숙련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교리의 풍조나 감정의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과 육정과 마귀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 넓은 체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고양되는 영적인 열정과 성령께서 주시는 확고 부동한 확신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반복된 시행 착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과 교활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대답해 왔다. 노리치의 줄리아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온전한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상과 생각 속에 들어가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였던 보나벤추어는 우린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면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순수한 관계라고 하였다.
두 가지 중요한 준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언의 기도가 당신에게 주는 소망의 메시지는 오늘날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과 혼잡한 언어의 정글을 당신이 말없이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 속에 임재하셔서 당신 속에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속에 내주하셔서 당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당신이 책이나 설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각과 빛을 주신다는 데 있다.
불결함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치명적이다.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은 결코 연합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신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 표현에선 "마음의 순수함이란 오직 한 가지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고, 하나님 외의 모든 충성의 대상들을 포기하고, 하늘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을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그것이 선한 것이며,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청결함이다
마음의 평정을 배워라
첫번쩨 단계는 전통적으로 '마음의 평정'이라고 불려왔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방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라. 아마 당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의 품안에 올려 드리고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이다. 억제란 내리누르는 것이며 제지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푸어 주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
두번째 단계로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것을 '고요의 기도'라고 불렀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렸다. 제임스 보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주님은 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우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신다. 주님이 내게는 '아빠'요, 아버지시다. 그분이 존재하시기에 내가 존재한다."
프랑소아 페넬롱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감화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은사들을 주실 때에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라. 당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 귀기울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모든 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과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침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인 신비 체험
무언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휼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책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가 올 터인데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말없이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그 영광이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인생 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게르하르트 테르슈터겐의 말대로 "지금도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3부 필요한 사역을 구하는 밖으로 향하는 기도
내적인 변화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둘 다 사역을 지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광로를 통해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이끌려 안기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을 체험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이다. 세계는 지금 자기 교만과 자기 과신의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
일찍이 우리는 영적 파산 상태에서 봉사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런데 실패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역이 영적인 풍성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만일 현명하다면 운하가 아닌 저수지로서의 면모를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운하는 물을 받아들이면서 사방으로 물을 다시 보내지만, 저수지는 기다렸다가 가득 찰 때까지 자체적인 손실 없이 흘러 넘치는 물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고 운하와 같은 사람이 많다. 이제 우리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결심하자.
15장 일상적인 기도
오늘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일종의 내적 분리 속에서 살고 있다. 마음 한 구셕 작은 곳에 경건 활동의 공간을 마련해 놓고는 나머지 생활에서는 전혀 영적인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생활 방식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순을 보지 못한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는 영성이 5퍼센트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데 있다.
이 현대적인 문제점은 일상적인 기도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일상적인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들을 기도로 바꾸는 것이고,
둘째는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셋째는 생활의 체험을 하면서 내내 기도하는 것이다.
행동으로 하는 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기도의 방해 요인으로 간주한다. "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시간이 좀 있다면 기도할텐데." 이것이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기도는 이미 꽉 짜여진 계획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일이 아니다. 일상적인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은 방해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큰 자산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 바로 일을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동으로 하는 기도이다. 화가, 소설가, 외과의사, 배관공, 비서, 변호사, 주부, 농부, 교사 등 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 기도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라"(고전 10:31)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고이다.
안토니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삶이 동반될 때문이다 삶이 뒤따르지 않고 기도와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기도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서 때때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일종의 정중한 서정시가 되고만다." 우리의 손과 마음으로 하는 일은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기도이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헌물이다.
"물의 전자" 라는 영화에서 가장 멋진 대사 중 하나는 아마 올림픽 주자인 에릭 리들 (Eric Liddell)이 그의 누이에게 했던 말일 게다. "제니, 나는 달릴떄 하나님의 기쁨을 느꼈어 "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쓰고 있건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건, 모두 직업 속에 스며들어야 할 실재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 이유는 창조적인 노동 활동에 종사할 때 창조주와 가장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이며, 그러할 때의 기도는 말로 할수 있는 기도보다 훨씬 더 나은 기도이다."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생활 중에 겪는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기도하는 것이다. 신문을 집어 들고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해야 할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해 그들을 잘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신속하게 드릴 수 있다. 학교 복도나 쇼핑 센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잡담을 나누다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그들을 위하여 신속히 기도할 수 있다. 동네에서 조깅을 하다가도 이웃에 사는 가족들을 축복해 줄 수 있다. 때로는 태양과 비와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정원을 가꾸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인 체험을 통한 일상적인 기도의 재료이다.
거룩함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정 환경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거룩함이 가정에서 이루어짐을 배우게 된다. 가정 내에서 좀 조용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능하다. 그곳이 기도처로 사용될 때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출입 금지 구역으로 알려져 있으면 된다.
어떤 가정들을 `가정 제단,' 즉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경험함으로써 도움과 힘을 얻어 왔다. 십대 이전에는 밤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과 잠든 후에 두번 기도해 줄 수 있다. 그날 받았던 정신적 충격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도 있고, 긴 밤과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도 있다.
십대는 적응이 필요하다. 십대들은 대개 자기 방에 누가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의 몸에 손이 닿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가족간의 기도도 좋아 하지 않는다. 비록 애정이 넘치는 기도의 본질이 종종 변화되어야 한다 해도 당신은 그들을 위해서 늘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것을 직접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점점 더 자녀를 독립시키는 기도를 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서 감정적인 탯줄을 끊어 버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종종 이때는 긴장의 시기다. 왜냐하면 십대들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의 믿음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재확인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그것을 거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자녀들이 급류를 통과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급류가 끝난 후에도 그 다음에 나타날 것에 대해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일상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6장 간구 기도
전능하신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왜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을 택하시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간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통해 뜨거워진다.
간구 기도와 중보 기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간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중보라고 한다. 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영적인 통찰력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하지만 진정 영적인 사람들은 간구의 기도를 넘어서서,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찬양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하는 기도는 더 유치하고 미숙한 형태의 기도인 반면, 찬양과 묵상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인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고상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영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간구의 기도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일생 동안 우선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초월할 수 없으며 또 초월하기를 원해서도 안된다.
한스 울스 폰 발타자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마치 소리 내어 하는 기도는 초보자들에게 더 어울리고 묵상 기도는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인 양 생각하고, 혹은 말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열등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둘의 관계는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결정짓고 전제하기 때문이고, 전자는 후자의 결과를 직접 가져오기 때문이다."
간구 기도의 두가지 문제
첫 번째 문제는 매우 합리적인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구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거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간구의 기도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여린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생긴다. 그것은 영적인 공손함으로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생활의 사소한 문제들로 하나님을 괴롭히지 않겠다. 이 세상에는 사소한 내 요구 사항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뒤로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우리 생활의 가장 작은 문제들까지 듣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포어시드 "언젠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거절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진실된 기도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최선이 아닌 것들을 구할 때가 많다. 떄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거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과 나의 기도 모두에 대한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자기 모순에 빠질 때도 더러 있다. "저에게 인내심을 빨리 주시옵소서"하는 식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보류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더 깊은 의도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보다 큰 필요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특정한 관심사를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죄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일반적인 내용과 아주 다르다. 내 의도는, 우리의 죄가 그 본질상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점점 근시안이 되어 가고 우리의 귀는 점점 어두워져 간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간구와 하나님의 마음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듯이 (약4:3), 우리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일단 내가 사랑을 준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두 손을 펴면 받을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빈손을 발견할 때 주신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들 가운데 복수를 위한 외침만이 들린다면 화해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좁아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범죄한 것만을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했는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성도 알지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으로 늘, 이런 저런 사람이 우리의 권리를 얼마나 많이 침해했는가 계산하고 있다면 사태의 본질상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인간 만사에 보복의 악순환이 있다. 공격당했을 때 그 대가로 보복하는 대신 용서하는 자가 되자 우리가 용서할 때, 바로 그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용서의 은혜도 강물처럼 흘러 넘치게 한다. 용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용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큰 혼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용서가 아니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용서는 우리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가 깊을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파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감정적인 고통이 우리가 용서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잊어버린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기능을 손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제 3개국인 나치의 암흑 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목사 헬무트 틸리케(Telmut Thielicke)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한다는 말과 잊어버린다는 말은 한꺼번에 해서는 안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기는 하되 용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그 잘못이 실제로 대수롭지 않았다고 가상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상황이 그 잘못을 저지르기 전과 똑같다고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기적으로서, 용서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분열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용서란 실제적인 상대방의 큰 잘못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가하면서 서로의 사이를 분열시키는 그 잘못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과실의 힘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묶여 있지 않게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초청하여 우리의 교제권 속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한다.
17장 중보 기도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중보 기도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간구에서 중보로 기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을 우리 자신이 필요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로 옮기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중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결혼 관계들이 깨어지고, 자녀들은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 개개인은 미래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말없는 자포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서 기도하기를 배운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요, 귀중한 특권이다.
중보 기도의 좋은 모범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중보 기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쟁사적으로 보면 여호수아가 그날의 승전 장군이었다.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앞장서 있었던 사람이 여호수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투의 이면에는 모세와 라론과 홀히 중보 기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 각자의 역할은 그 승리의 필수적이었다. 여호수아는 공격을 선도하였고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다. 이론과 훌은 모세가 지쳤을 때 그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포어시트는 "우리가 결단의 골짜기에 더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기도의 산으로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며,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주 관심사인 사람들의 두 손을 떠밭쳐 주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날드 블뢰쉬 (Donald Bloesch)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이 대속의 희생과 구원의 중재가 없이는 우리의 기도가 아무런 가치나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기도의 삶을 위한 원동력임을 알고 거기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중재나 중보 없이는 우리가 완전히 무기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구세주요 구속자이신 그 아들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끈질긴 기도가 승리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면 그 결과가 더디고 고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쉽게 낙담하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다. 하나님의 길은 사뿐히 땅 위에 내려서 땅을 적신 후, 땅 속으로 사라지는 눈이나 비와 같다. 그리하여 적절한 때가 되면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한다. 조작도 없고 통제도 없으며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길이다.(사55:8-11)
우리는 한 두 번 기도하다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문제로 넘어가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샐쭉해지거나, 기도를 완전히 포기하기도 한다. 간구는 열심을 갖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기도하는 일에 대해서 극도로 심각하다고 하는 선포이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똑같은 간구를 두 세번만 반복해서는 안된다. 필요할 때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꾸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일에 결코 지쳐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분의 이름이 새겨지고 하나님이 손수 기록한 초청장을 주시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게 하신다.
18장 치유의 기도
네 가지 단계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치유의 기도에 대한 간단한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들어야 한다. 이것은 분별의 단계이다. 사람들에게 귀기울어지고 또 하나님께서도 귀기울이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속의 필요를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털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면, 정말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종종 우리 마음속에서는 "예"라는 소리가 우러나온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그 상황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하느냐고 정중하게 묻게 된다.
둘째, 구해야 한다. 이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만약에,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말들로 우리의 요청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셋째, 믿어야 한다. 이것은 확신의 단계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다시 말하면 전인격적으로 믿는다. 때때로 우리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건, 약하다고 생각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확신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기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특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넷째,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의 단계이다. 우리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면 조그마한 예절만 있어도 감사를 표하게 된다.
19장 고난의 기도
고난의 기도에 관한 것 기도의 형태 중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 중심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의 기도이다. 고난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나 소원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우리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연합과도 거리가 멀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사용하시기를 구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애통을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 속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써 변화된다. 우리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고 용납하기 위해서 넓어진다. '그들'이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바뀐다. 그것이 지적이건 문화적이건 영적이건 간에 우리가 우위에 두었던 모든 것들이 가만히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뒤에 숨어 있는 억누를 수 없는 힘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요, 순교자가 되는 길을 찾으려고 함도 아니다. 이것은 불행을 위한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다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의 기도의 가치는 무한하다.
윌리암 펜(William Pemm)의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토마스 켈리(Thomas Kelly)"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향을 좇아 거룩한 순종에 길에 십자가를 심어 놓으셨다". 그 고난은 무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뛰어난 것으로 여기시고 또 그렇게 사용하신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여기저기서 마치 반사된 달빛과 같은 희미한 불빛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가리개가 제거되고 비늘이 떨어져 나가서 고난 속에서도 대낮의 햇빛처럼 빛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신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고난의 기도의 또 하나의 가치는, 고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민감해진다는것이다. 헨리 누웬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상처 있는 치료자들'이다. 모든 것을 좋게 하는 꼭맞는 해답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고난을 겪는다. 글렌 힌슨이 말한 대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포로 닦아 매끄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인식하게 도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역의 출발점이 된다.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고난의 기도에는 소극적인 측면도 있고 적극적인 측면도 있다. 오늘날 절망과 궁핍을 견뎌 낼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난의 기도야말로 이런 능력을 배양시킨다. 장 니꼴라 그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위해 참고 견디어라. 복종과 인내로 고난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고난을 당하라. 그러면 당신은 매우 탁월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바르게 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도 우리의 슬픔을 옮기시고 그 슬픔을 사용하여 세상을 치유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짐을 양 어깨에 계속해서 짊어질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 짐을 하나님의 품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짐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워 마음속에 낙심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짐을 질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작은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그들이 스스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모든 일을 하나님께 위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드리는 회개
고난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회개하는 은혜를 받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우리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좌절과 빈곤, 그리고 그들의 죄책과 지옥의 형벌을 우리 자신이 짊어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대신하여 탄원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대신하여 우리 자신의 문제로 알고 대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씨름
터툴리안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거룩한 폭력"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받을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그의 공의로 우심보다는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투쟁은 사랑과 병행한다. 왜냐하면 투쟁이야말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다. 애처로운 울음도 아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표현한 대로,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는 끊임없는 격렬한 행동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열심을 아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소리가 들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찬양의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고뇌한다. 그리고 울부짖고 큰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흐느낌과 눈물로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는 발버둥치는 믿음의 신음이 된다. 찰스 스펄전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처럼 "기도는 하늘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전능자를 기도의 소원대로 움직일 수 있다."
금식은 우리의 투쟁의 한 표현이다. 금식은 격렬한 영적 활동을 위하여 스스로 정상적인 기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각함과 강렬함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금식이란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게를 가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믿음은 강해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고통스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우리도 이기고 하나님도 이긴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의로운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싸워 이기며 하나님도 거기에서 이기신다.""
20장 권세 있는 기도 - 분별력과 신중함의 보조 레일
분별력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이며 신중함은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중심 덕목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서로의 균형을 잡아 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분별력은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감정적인 상처로 인해 생긴 복합젹 인격과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혼란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너무나 매료된 나머지 인생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현대 사회의 자연주의적인 추정에 속아넘어가서 초월적인 것들의 흔적을 보지 못해서도 안된다.
영적 분별의 은사에 대해서 알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분야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다. 먼저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 루이스는 말하기를 "신중함이란 실제적인 상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해 내려고 얘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중함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예수님은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바르게 행동하셨다. 예수님께서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돼지가 더럽기 때문이 아니라, 돼지가 진주를 소화시킬 수 없어서 결국엔 진주가 돼지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람들이 미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리는 사람들에게 주지 않을 만한 지각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결국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감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는 명령도 옳고 유익할 때에만 해야 한다.
상식적인 조언
첫째, 이 이야기를 통해 모든 고통이 악마의 공격이라고 추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은 어디까지나 고토에 불과하다. 고통에는 고통 이상의 의미가 없다.
둘째,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특별한 목소리를 훙내낸다든가 어떤 기괴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정상적으로 말할 수도 있고, 상황에 적절하게 보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셋째, 우리에겐 의지할 만한 특별한 자원이 있다. 특정 사역을 위해서는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다. 적절한 때에 우리는 성령의 권능이 더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언제나 자신을 에워싸고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을 덮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신을 인봉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한다.
넷째,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확고하게 다루되 그 개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들이 절대로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들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다섯째, 권세 있는 기도는 훈련된 생활 습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여섯째, 이 일을 수행할 때나 다른 사람들과 연합해서 하는 것이 더 좋다. 이 사역은 한 번 하고 떠나 버리는 그런 사역이 아니다.
일곱째,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영적인 겸손함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일반적으로 기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권세 있는 기도는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권세 있는 기도는 특별한 땅의 문제를 해결학기 위해 하늘의 자원을 가져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래로 향하는 기도이다.
월리암로는 , 기도는 강력한 도구하고 하면서 "인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라고 하였다. 오 할레스비 박사는 똑같은 삿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기도는 하늘의 권능을 땅으로 가져 오는 통로이다." 사실상 우리는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기도한 것이다.
어린양의 전쟁을 수행하라
제임스 네일러 그리스께서 우리의 마음과 양손에 영적 무기를 들려 주셨다. 이는 이 세상의 군왕들처럼 채찍과 감옥과 고문과 고통을 가지고 정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전재을 수해하기 위함이다. 증오 대신 사랑을 가져오며, 하나님과 더불어 악의에 대항하여 싸우며, 주야로 기도와 눈물로 전쟁하며, 금식과 탄식과 애통으로, 인내와 충성과 진리로, 그리고 거짓 없는 사랑과 오랜 고통과 성령의 모든 열매로 전쟁을 수행하여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는 위함이다.
우리의 권세를 사용하라
그 일은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질병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질병는 하나의 적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공포증 환자나 신경증 환자에게는 마음의 안저을 선포해야 하며, 열벼은 떠나가라고 꾸짖어야 하며, 암세포의 경우에는 피의 공급을 중단시켜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온전함과 행복이 조용히 밀려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진보를 방해하는 모든 '산'에 대항함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말도록 명렬해야 햔다. 또 온각 종류의 악한 생각과 의심과 왜곡된 사실에 대항하여 견뎌 내야 한다. 분노와 시기와 험담의 영을 묶고 용서와 사랑과 믿음의 영를 풀어 주어야 한다.
또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가능하다. 악령이 역사는 것을 볼때마다 우리는 단호하게 악령의 역사가 물러가도록 명령해야 한다. 주도권은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있다. 즉 권능의 사역에서 볼떄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삶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다스릴 권세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적 전쟁은 모든 사회악과 제도적인 불의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구조에 대해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부당한 법에 대해서 항거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값없이 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깊은 기도와 가장 위대한 겸손의 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리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21장 철저한 기도
"기도를 하려고 두손을 모르는 것은 이 세상의 혼란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행동의 시작이다.
철저한 기도란 뿌리와 심장과 중심에까지 내려가는 기도이다. '철저한'이란 말은 라틴어의 '라딕스'에서 온 말로 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철저한 기도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들의 가장자리에 맴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히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목표는 사람과 제도와 사회의 완전한 변화이다. 알고 보면 , 철저한 기도는 예언자적인 기도이다.
영적 저항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입장을 하늘 보좌에 탄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요구해야 하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장해야 한다. 월터 윙크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인 기도는 뻔뻔스럽고, 굽힐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정중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바자회에서 끈질기게 값을 깎는 흥정과 더 흡사하다.
우리의 영적 저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일치한다고 믿어 질때,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 도날드 블로쉬는 "때때로 믿음의 기도에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또 마틴 루터는 "기도의 힘은 너무나 커서 하늘과 땅을 모두 이겼다."고 했다.
우리의 저항의 무기를 보면, 우리가 권력과 효율과 통제에 기초한 세상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며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불의와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놀라운 것은, 이무기들은 사탄의 요새를 무너트리며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사회적 성격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로써, 사람들을 우리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금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복받는 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그만큼 거짓된 믿음이다.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러므로 우리는 개개인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열방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 이 온 땅 위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힘써 일해야 한다. 그 다음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상의 죄악들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국이 어떤 나라든지 간에 우리 나라의 죄악부터 회개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나라가 없으므로 우리는 조국의 대표자가 되어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기도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도는 종종 개인적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결코 예배하고 기도하는 친교의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기도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세심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자칫 기도는 무익한 것이라고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찰력 있는 생활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금방 체면치레와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
최고의 법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만이 하나님꼐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소위 본 회퍼가 '꿈속의 소원'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 관계 위에 부과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만다. 인간 스스로의 사랑은 그 자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아가페는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고, 보답을 요구하며 시행된다.
반면에 아가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본 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사랑이 순수한 영적 사랑을 만나게 되면 개인적인 증오로 변하고 만다. 그것은 진정한 영적 사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만다.
우리는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며,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망각하는 것은 하나님도 곧 망각하는 서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그렇지 않게 보이려고 애쓴다 해도 우리의 섬김은 언제나 일부러 공손함 체하는 교만함으로 물들고 만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사랑이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준다. 기도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우릴 이웃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렬고 할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생명력을 부여한는 끊임없는 그 사랑의 교재 속에 들어가게 된다.
참되고 온전한 기도는 '사랑' 그것뿐
나는 성 어거스틴의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내면으로 향하게 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모습으로 빚으며 이루어 가는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보았고, 그 다음 우리는 위로 초대를 받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꼐 귀기울이는 친밀함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밖으로 부름을 받아 병자를 치유하며, 상처받은 자와 고통을 나누고, 세상을 위해 중보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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