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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4 14:17:27   read : 998


청교도의 저작들 대부분이 설교나 신학적 저술임을 감안할 때,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은 존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과 더불어 청교도 문학을 대표하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학부 때 철학을 공부했는데, 당시에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던 교수님께서 고·중세 철학사 강의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잘 쓰인 소설 하나가 몇 권의 철학서가 담고 있는 것보다 진리를 더 잘 드러낸다는 생각을 때때로 하게 됩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예로 든 소설은 최인훈 씨의 「광장」이었다.
그 후 「광장」을 읽으면서 조국 분단과 민족 상잔이 있은 지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려서도 여전히 우리 민족을 붙잡고 있는 이데올로기 문제를 고민하고, 조세희 씨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1980년대 초 우리 사회의 다수가 겪었던 빈곤과 부조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그 교수님의 말씀에 공감했다. 철학은 냉철한 지성에 진리를 새기려 하지만, 문학은 지성과 더불어 감성에 호소하기에 문학이 담아내는 진리는 철학의 차가운 진리보다 훨씬 더 우리 속에 깊이 박히는 것이다.
신학도 체계적인 학문이다 보니, 자칫 철학처럼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신학의 고유한 역할을 고려할 때 그런 점을 흠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앙이 문학적으로 제대로 승화된다면, 그것은 신학보다 훨씬 진한 감동을 줄 것이다. 그 예를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본다.

탁월한 설교가 존 번연의 옥중 작품
존 번연은 1628년 11월 케임브리지에서 서쪽으로 30마일 가량 떨어진 베드포드(Bedford) 마을 남쪽의 엘스토우(Elstow)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번연(Thomas Bunyan)의 조상들은 적어도 12세기 이래로 그 지역에서 살았으며, 어머니 마거릿 벤틀리(Margaret Bentley) 역시 엘스토우 토박이였다. 토머스 번연은 놋갓장이, 즉 냄비나 주전자를 만들고 수선하는 양철공이었기에, 존 번연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땜장이가 되었다. 164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두 달 만에 재혼했다. 그해 11월에 만 16세가 된 존 번연은 의회파 군대에 입대했다. 그가 군복무 기간 중에 큰 규모의 전쟁에 참가한 흔적은 없다. 1647년에 부대는 해산되었고, 존 번연은 엘스토우로 돌아왔다.

존 번연은 1648년 말이나 1649년 초 어간에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경건한 가정의 출신이었는데 시집오면서 두 권의 책, 즉 아서 덴트(Arthur Dent)의 「순전한 사람의 천국 가는 길」(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과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실행」(The Practice of Piety)을 가져 왔다. 번연은 그 책들을 읽고 맹세하는 습관을 버렸고, 규칙적으로 교회 출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 활발한 이야기꾼 정도였던 번연은 몇몇 가난한 여인네들이 나누는 대화를 귓결에 듣고선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번연은 영적 진실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추구로 3, 4년 정도 내적 갈등을 겪은 후에야 영혼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
1653년에 번연은 그 가난한 여인네들이 속해 있던 비국교도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들은 베드포드의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에서 모이고 있었는데, 목사는 존 기포드(John Gifford)였다. 번연은 기포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655년에 기포드 목사가 죽고 같은 해 번연의 아내마저 네 아이들을 남겨놓은 채 죽고 말았다. 그 해에 번연은 집사로 뽑혀 자신이 가진 권면의 은사를 사용하게 되었고, 1657년에 설교자로 세움을 받아 땜장이 일과 더불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설교를 했다. 설교자로서 번연의 명성이 점점 퍼져나갔고, 1656년부터 시작한 저술 활동을 통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660년 왕정 복고 후 비국교주의에 관한 법령들이 되살아남으로써 번연은 허가 없이 설교한 혐의로 체포되어 주(州)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되기 한 해 전인 1659년에 번연은 엘리자베스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엘리자베스는 전처 소생의 네 아이들을 돌보았을 뿐 아니라 두 아이를 더 낳았다. 그녀는 번연의 오랜 수감 기간 동안 당국에 남편의 석방을 열심히 호소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번연은 수감 중에 많은 저술을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죄인의 괴수에게 충만한 은혜」(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이다.
1666년에 번연은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6개월이 채 못 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이유는 설교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년 동안의 수감 생활에서 앞의 6년 동안만큼 많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저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생각을 갖고 있던 찰스 2세의 은밀한 의도로 1672년 로마 가톨릭과 비국교회 신도들에게 관용을 허용하는 신교자유령(信敎自由令)이 반포되었을 때 사면 받은 비국교도들 중에 존 번연도 포함돼 있었다. 이미 번연은 베드포드의 비국교도 교회의 목사로 초빙 받았는데, 그 교회는 더 이상 성 요한 교회에서 모일 수 없어서 회중들 중에 한 사람의 과수원 헛간에서 모이고 있었다. 이제 번연의 목회 사역은 베드포드를 넘어 주 전체와 그 너머로 확대되었다.
신교자유령이 일시 철회됨에 따라 1676년에 번연은 다시 수감되어 6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는데, 이때 ‘잉글랜드의 칼빈’이라고 부르는 존 오웬(John Owen)이 번연의 석방을 위해 애썼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수고(手稿)를 출판사에 추천한 사람도 오웬이었는데, 찰스 2세가 그에게 “왜 교육도 받지 못한 땜장이의 말에 그렇게 귀를 기울이냐”고 묻자, 그는 “폐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의 설교하는 능력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저는 저의 모든 지식을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출판되어 그 해에 2판이, 이듬해 3판이 나왔다. 번연의 주장에 따르면 그 작품은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쓴 것이다.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시기가 마지막 6개월 수감 기간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늦어도 1672년 이전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로역정」 앞부분에 저자의 변명에도 나와 있듯이, 번연이 그렇게 중대한 주제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다룰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천로역정」의 출판을 미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로역정」이 출판되었을 때 번연의 걱정이 기우였음이 금방 드러났음은 물론이다. 1684년에 「천로역정」의 제2부가 나왔고, 이때쯤 번연은 저술과 설교로 인해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1688년 봄 번연은 발한증(發汗症)을 앓아 몸이 쇠약해졌다. 그해 8월 19일에 마지막으로 설교하고 난 뒤 열병에 걸려 31일에 숨을 거뒀다. 존 번연은 런던 핀즈베리(Finsbury)의 번힐 필드(Bunhill Fields)에 묻혔다. 사람들은 존 번연을 침례교도로 분류하는데, 번연 자신은 교파적 레테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번연이 스스로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정치적인 면에서였다. 번연은 세례 방식에 관한 차이로 어느 누구를 배척한 적이 없었고,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자였다.

비유 형식으로 쓴 신자들의 인생 여정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은 영어 제목 그대로 ‘순례자의 행진’을 의미한다. 제1부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가장(家長)이 함께 떠나기를 거부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현재의 삶에서 여러 가지 유혹과 시련을 이기고 천국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제2부는 뒤늦게 깨달은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애너’(Christiana)가 남편이 앞서간 순례의 길을 네 아이들과 함께 뒤따라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번연은 비유의 형식을 써서 순례자의 여정을 묘사하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일반적으로 겪고 접하게 되는 성격이나 특성들로 등장 인물들의 이름과 출신 지역명을 붙여놓았다. 주인공의 이름이 ‘크리스천’이고 여주인공의 이름이 ‘크리스천’의 여성형에 해당하는 ‘크리스티애너’인 점을 고려해 볼 때, 존 번연은 자신의 소설이 바로 신자들의 인생 여정을 그린 것임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천로역정」을 읽다보면, 초두부터 우리의 신앙 여정의 출발을 어찌 그리 적절하게 잘 묘사하고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크리스천이 가족들에게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장차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피난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그가 미치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여러 방법으로 그의 광기를 몰아내기에 애썼다. 실제로 우리 중에 자신이 선고받은 죽음과 그 다음에 있을 심판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고민하여 주위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죄 문제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경험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죄로 인한 고민 때문에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크리스천에게 갈 길을 보여준 것은 ‘전도자’였다. 전도자가 가리키는 대로 밝은 빛이 비취는 쪽에 있는 좁은 문을 향해 크리스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순례의 시작이었다.
크리스천은 가는 길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 ‘고집쟁이’, ‘쉽게 휘어짐’, ‘세속의 현인’같이 그의 여정을 비난하고 방해하는 이들도 있었고 ‘도움’, ‘후의’같이 그의 여정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이들도 있었다. 때로 크리스천은 방해꾼들에게 속아 잘못된 길로 빠져 심한 고생을 격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위험에서 도와주는 손길들 덕분에 빠져나와 다시 순례의 길로 되돌아오곤 했다.

크리스천이 장차 멸망할 도시를 떠나 시온 산으로 가기까지 거쳐 가거나 언급된 지명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실망’의 수렁, ‘세속 정치’ 마을, ‘도덕’ 마을, 바알세불의 성, ‘구원’의 담, ‘인고’의 길, ‘위험’의 길, ‘파멸’의 길, ‘아름다운’ 궁전, ‘평화’의 침실, ‘겸손’ 계곡, ‘죽음의 그늘’ 계곡, ‘교황과 이교도’의 굴, ‘기만’ 마을, ‘무상’(無常) 마을, ‘허영’ 시장, ‘탐욕’ 지방, ‘안일’ 평지, 데마스의 은광, ‘샛길’ 초장, ‘의혹’의 성, ‘기쁜’ 산맥, ‘실수’ 봉우리, ‘주의’(注意) 산꼭대기, ‘명백’ 봉우리, ‘자만’의 나라, ‘배교’ 마을, ‘성실’ 마을, ‘안심’ 도시, ‘정직’ 마을, ‘은혜를 알지 못함’ 마을, ‘죽음’의 강 등등….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평안과 기쁨과 더불어 우리를 유혹하고 또 넘어뜨리기도 하는 그런 잘못들이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2부에서는 크리스티애너와 네 아이들이 크리스천이 경험했던 것들을 동일하게 겪기도 하고 다른 경험도 하게 된다. 그것은 번연이 제2부 초두에 “나의 첫 번 순례기가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을 너, 나의 멋진 두 번째 순례기가 밝혀내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 데서 예견할 수 있다.
제2부 후반에서 크리스티애너의 네 아들들이 경건한 처녀들과 결혼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이 후대로 계승되는 것을 보여준다. 제2부의 대미(大尾)는 크리스티애너부터 시작해 순례자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죽음의 강을 건너 천성의 문으로 들어가는 내용이다. 가장 먼저 크리스티애너가 죽음의 강을 건넜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러했다. “주님, 주와 함께 거하며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금 갑니다.” 크리스티애너를 여의고 자녀들은 모두 울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애너가 순례의 길에서 만나 그 일행과 함께 했던 ‘큰 마음’과 ‘진리의 용사’는 심벌과 하프를 즐겁게 연주했다.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작별이라는 슬픔 너머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찬양하는 지고한 영광의 시작이라는 큰 기쁨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애너 다음으로 ‘망설임’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담대함 가운데 죽음의 강을 건넜고, ‘심약자’ 역시 나약한 마음을 버리고 그 뒤를 따랐다. ‘낙심’도 낙담을 버리고 기쁨으로 그 강을 건넜고,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정직’과 ‘진리의 용사’도 뒤를 따랐다. 번연이 제2부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의 강을 건넌 성도로 묘사하고 있는 ‘불굴’은 강의 중간쯤에 들어섰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쪽 강변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가끔 이 강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웠지요. 그러나 지금 나는 이렇게 편안히 서 있습니다. … 강물이 쓴맛이고 몸에 차가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목적지와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호송자를 생각하니 나의 심장에 숯불이라도 피운 듯하군요. 이제 나의 여행은 거의 끝났고 괴로운 날들도 모두 지나갔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위해 가시관을 쓰셨고 조롱의 침을 받으신 그분의 얼굴을 뵈러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나는 풍문과 믿음에 의해 살아왔습니다만, 지금 나는 즐겨 모시고 싶은 그분을 친히 뵙고 곁에 모실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저를 받으소서. 당신께로 가옵니다”라는 말과 함께 ‘불굴’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죽음 앞에서 이보다 더 담대한 사람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천로역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을 지향한다. 험난한 역경과 모진 시험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순례의 길을 가는 이들의 최종 목표는 천성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라는 배달부의 전갈을 받고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오히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약함과 낙담 그리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기쁨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천성을 향해가는 순례자의 두 조건, 용기와 깨끗한 생활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이라는 개혁 신학 용어는 죄인이 구원받는 과정을 인과적 관계에 따라 시간적 순서대로 나열한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부르심,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혹은 궁극적 구원)의 순서다. 조직 신학이나 교의학에서라면 다소 딱딱한 용어들을 사용해 설명해야 할 우리의 인생 여정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너무나 쉽고 살갑게 묘사한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게다가 「천로역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도움도 매우 실제적이다.
첫째, 크리스천 그리고 크리스티애너 일행이 만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이 경험하거나 듣게 되는 여러 상황들은 오늘날 신자들이 인생 여정에서 겪게 되는 많은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삶의 경계(警戒)가 된다. 분주함과 잡다함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신앙의 문제들을 번연은 너무나 세밀하고 깊이 있게 드러낸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여러 등장 인물들과 장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살펴보고 진단할 수 있다. 더구나 번연은 인생의 문제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인을 파헤쳐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천로역정」은 훌륭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둘째, 「천로역정」은 세상 자체에 점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세상의 삶 자체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결국 궁극적인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천로역정」의 백미(白眉)는 순례자들이 죽음의 강을 담대하게 건넌 후에 천성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인생이 속히 지나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잊은 채 영원한 것을 바라고 소망하기보다 현재 삶의 즐거움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순례자들의 삶을 보고 천국을 열망하고 사모하게 된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천로역정」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셋째, 「천로역정」에서 번연은 순례의 길 틈틈이 신자의 삶과 관련된 윤리적 지침들을 제시한다. 가령, 탐욕에 대한 경계나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등 매우 구체적인 지침들이 들어 있다. 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성인’(聖人) 씨가 한 말이다.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이 반드시 구비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용기와 깨끗한 생활이지요. 만일 용기가 없다면, 끝까지 길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다면, 순례자라는 이름에 먹칠하는 것일 뿐이지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올바로 걸으며 순례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결하게 사는 것이 바로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인 것이다.

빛과 소금/ 글 · 임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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