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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바로 알고 합시다!
2004-02-03 10:49:07   read : 778

<< ‘올바른 기도’에 대한 생각>>

구체적으로 다양한
기도의 현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기도’가 아닌가 한다. 신앙서적의 베스트 자리에 기도에 대한 책들이 빠지지 않고 놓여 있는 것을 보더라도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약간 주춤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셀러 10권 중 6권이 기도에 대한 책일 만큼 ‘기도’는 그리스도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는 어릴 적부터 들어오던 정의에서부터 ‘기도는 전투다, 영적전쟁이다, 노동이다, 대화다’ 등의 다양한 정의가 있다. 이토록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기도’에 대한 연구 부족 때문이 아니라 기도의 세계가 매우 넓고 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개인의 경험과 삶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도의 대가’는 누구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정도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기도의 대가’여야 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기도의 대가’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하루에 세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났다는 루터를 말하기도 하고, 로렌스 수사 형제의 기도의 능력을 말하기도 하며, 2만 번 또는 5만 번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나 기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인 작은 책들을 쓴 이엠 바운즈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중보기도에 대한 책인 좥대적의 문을 취하라좦 를 통해서 신디제이콥스를 중보기도의 대가로 보기도 한다. 국내 목회자 중에서도 대천덕 신부나,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교회로서 이름이 높은 교회의 목사님들과, 좥사귐의 기도좦 등에서 기도를 말한 신학교수들이 ‘기도의 대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이 ‘기도의 강자’들이 말하는 ‘그 기도’ 역시 어느 부분에서 상반된 듯한 내용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올바른 기도’에 대한 기획 특집을 하나로 결론짓기 보다는 우리가 알고 실제로 경험하는 다양한 ‘기도’의 현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서 기도를 가르치는 교사요, 삶 속에서 기도를 실천하는 실천가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기도’에 대한 생각이었으면 한다.

<<기도는 매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신다.

구약성경의 제사법은 매우 복잡해 보인다. 그러나 민수기 28장의 제사법 설명은 매우 명쾌하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한 설명이 번잡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민수기 28장에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수기 28장을 명쾌하다고 보는 주된 이유는 제사법 설명에서 무엇보다 먼저 상번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라는 말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안식일에는 안식일 제사를 드리면서도 이 상번제는 따로 드려야 한다. 월삭에도 그렇고, 특별한 절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상번제는 365일 지속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 하였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사의 향연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기도다. 요한계시록 5장과 8장에서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 전의 향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과 제사법에 대한 민수기 28장을 함께 엮어 놓고 보면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얻는 가장 기본적인 규정은 기도는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기술이나 기도의 의미 혹은 기도에 대한 여러 가지 신비적 체험 또 거기 이어지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수사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번제를 설명하는 민수기 28장은 아침과 저녁에 상번제를 드리라고 한다.
우리의 기도도 아침과 저녁으로 이어져야 한다.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는 이 말씀을 대하였을 때, 우리 교회가 매일 새벽에 새벽기도를 할 뿐 아니라, 매일 저녁에 저녁의 기도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세상이 번잡하여 기도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저녁마다 교회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휴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휴식이라는 관점도 그렇다. 제사들을 살펴보면 특별한 제사가 있는 날에는 노동을 쉬라고 민수기 28장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물론 상번제를 드리는 평일에는 노동을 한다. 그런데 제사에는 이렇게 노동을 쉰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도가 우리의 산 제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기도에서 이런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노동이 이 세상의 수고인 것은 분명하다. 범죄 후에 하나님께서 이 땅의 수고로 노동을 주신 것이 분명하다. 또 내가 원한다고 노동을 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휴식의 시간에 다른 일보다 기도에 힘을 써야 한다. 기도보다도 당장은 느슨하게 쉬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정신을 맑게 해서 기도하면 그보다 더 큰 휴식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왕 매일의 기도와 기도의 휴식에 대해서 말했으니, 가장 간단한 기도 하나를 말하고 싶다.
특히 동방 정교에서 꾸준히 이어온 기도에 ‘예수 기도’가 있다. 그것은 짧은 기도문을 연속하여 외는 방법인데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를 연상케 하는 기도인데, 나는 이 기도가 특히 정신이 혼미한 노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을 보았다. 임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른이 이 기도문을 받아들이면서 주님도 영접하는 것을 보았다.
한편 잔느 귀용은 좥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체험하기좦(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에서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주기도문만 열심히 묵상하여도 큰 영성수련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삼천 번 암송하는 그런 수련도 있는 것 같다. 좀 미신적으로도 보이고, 민간 종교에 섞이는 듯한 인상도 주지만, 그런 수련이 있다는 것은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 기도를 한다든지, 주기도문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든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우리의 기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그렇게 매일 매일 하는 것인 만큼 한편으로는 민중적인 것이다. 누구라도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신다.

<<기도는 행동양식을 포함합니다>>

기도는 구한 후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것까지 포함한다

예수님은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고 복 받기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랑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빈 자리가 있고, 또 이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간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것은 기도를 단순히 정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경우다. 그것은 잘못이다. 기도는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행위다. 기도를 단순히 불교의 참선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참선은 조용히 앉아서 염주를 돌리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다. 내면 속에서 기도를 통한 마음의 평정과 소원을 아뢰기도 하지만, 그 기도제목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도 기도에 포함된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움직임을 전제로 한 정적인 단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마치 개구리가 멀리뛰기 위해서 몸을 움추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기도 없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것은 기계에 윤활유를 치지 않고 작동시키려는 것과 같다. 기도는 모든 일의 첫단추다. 그런데 기도한 다음에 그 기도제목을 이루기 위한 행동양식이 있는가?
이런 예화가 있다. 한 마을에 가뭄이 들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교회에 모여서 비 오기를 기도했다. 그때에 한 소녀가 우산을 바깥으로 들고 나갔다. 한 집사님이 물었다. “얘야, 이렇게 햇빛이 쨍쨍한 날에 우산을 왜 들고 나가니?” 그때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저씨들이 지금 비 오라고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렇다. 기도는 구한 다음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단계까지도 포함한다. 그것이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말씀하신 기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 성경이 말하는 기도인지가 문제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기 싫어서 하나님께
모두 맡겨 버리는 편한 일이 아니다

구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구약의 여러 가지 제의들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쉽다. 특히 구약제사 중에 제사나 향 등에 대해서 우리 시대의 기도나 예배 참석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구약에서 제사나 향은 제사와 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신약시대의 기도와 견줄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시대에 수많은 기도들이 있었고 구약은 제사와 기도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의 모형과 실천방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제사의 규례에서가 아니라 신약, 심지어 구약에 나오는 많은 기도의 예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도가 마치 무속종교나 불교의 치성과 열심의 대명사인양, 열심히 꾸준히 많이 하면 좋은 것이고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매일 드리는 기도, 소원을 성취할 때까지 무작정 반복해서 드리는 기도, 주례행사(weekly practice)로 행하는 무슨무슨 기도회, 소원성취를 비는 무슨무슨 작정 금식, 철야 기도회 등의 기도원칙과 공식들은 ‘기도의 일상성’을 강조하는 구약이나 신약의 일부 구절들을 떼어내고 기도나 예배의식의 참여를 확대적용하는 식으로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과대포장하는 것을 우려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이제는 범사에 감사헌금 내라는 식이 되어버렸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목적이나 줄기차게 무조건 요구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관행이 되어 버린 현재 한국교회의 관행은 내가 볼 때 ‘아니올시다’이다. 진정한 감사는 표현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문제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합심기도도 좋고 대표기도도 좋고 심지어 기도에 능통한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장소를 찾아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기도의 형식과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기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도를 많이 하던 백성이고 모범기도도 많던 당시에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예수님께 모범 기도문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에 대한 예들을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외식하는 기도 이 모든 것들이 기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원하시는지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난을 받은 것은 아닐까?
기도와 경건운동의 본산지로 여기는 수도원에 중세에 아주 의미심장한 표어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기도는 곧 노동이며, 노동은 곧 기도다.” 수도원을 고립과 탈속의 상징처럼 알고 있지만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그들은 기도라는 중노동을 수행하였다는 점뿐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기도의 의미를 찾았다는 점에서 기도를 노동과 동일시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아무것도 안하고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곧 실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도는 내가 하기 싫어서 하나님께 모두 맡겨 버리는 편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나와 가족과 교회와 민족과 국가와 온 세계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행동은 거의 없다. 우리는 나라가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실제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더더군다나 우리는 고난을 향유하도록 기도하지 않고 고난이 내게서 멀어지도록 기도할 뿐이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에는 의에 대한 갈망이 없다. 기도 없는 행동은 불신의 상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동 없는 기도는 신앙의 덕목도 아니다. 기도는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에, 적은 기도와 많은 행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적은 기도에 더 적은 행동은 태만이며 바른 기도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우리는 기도한 것과 다른 현실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절망하거나 불신앙의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정답일까?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다른 현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물러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정답일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어느 샌가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시위로 변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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