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이 들어 주실까?
2004-02-12 16:51:54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예수께서 나가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그 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셨다. 그런 다음에 그들과 헤어져,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 그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눅22: 39-44)

한 여학생이 교회당 뒤쪽 구석에 앉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도 간절하여 마음이 애처로울 지경입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능한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놈이 그 여학생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나 봅니다. 정말 어머니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애절한 바람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이별이 주는 두려움이 그 여학생을 기도하게끔 만들었습니다.



- 믿고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이 들어 주실까?


아마도 그 여학생의 마음속에서는 끝없이 의문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믿어야 돼. 믿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아. 하지만 정말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제발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안 그러면 정말 안돼요. 정말 앞으로는 신앙 생활 잘 할께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 여학생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인간의 능력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기도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설령 기도하면 응답이 되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서지 않을지라도, 기도는 유효한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해볼 만한 것이 그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마지막 남은 유일한 희망이기에 그 기도의 성공 가능성을 따질 여유가 없습니다. 혹시나 의심 때문에 부정(?)타면 안 된다는 우려와 조바심이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더욱 채찍질 할 뿐입니다.

모든 기도는 응답되어진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도한 대로 일이 성취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믿음으로 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간증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대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기도대로 되면 응답되었다고 말하고 기도대로 안 되면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질책하고, 그건 하나마나한 얘기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나서게 마련입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장난이라는 거지요.

이에 대해서는 또 적절한 변명이 있습니다. 응답에는 '예스'만 있는 게 아니라 '노'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들어주는 것만이 응답이 아니라 들어주지 않는 것도 응답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달라는 대로 부모가 다 해주어서는 안 되듯이, 하나님도 인간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시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얘깁니다. 아이의 처지에서는 원하는 바이지만 부모의 눈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것도 많이 있듯이, 인간이 보기에는 가장 절실히 원하는 바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온당치 않은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보다 더 능력 있는 분으로서 인간에게 더 좋은 바가 무엇인지 아시기에 인간의 어리석은 간구를 물리치십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기도한 바대로 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응답에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고통을 앞에 놓고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난 다음, 홀로 유대 군중들에게 이끌려가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당해야 할 고통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신 앞에 닥친 고통의 그림자를 보면 두려워 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피하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도 똑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에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니요.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도록 되어있다면, 굳이 아버지의 뜻이거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든 말든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게 되어 있는데, 거기다가 '하나님의 뜻이거든' 이라는 조건을 달고 기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거든 잔을 피하게 해달라니. 이는 하나마나한 요구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말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하면서, 실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내 뜻대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위선적 기도입니다.

과연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신 것일까요? 그저 두려움을 감당치 못해 두서없이 투정을 부리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기도의 핵심은 잔을 피하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았습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잔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죽음의 잔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어느 상황에서든 다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요구를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이런 것을 원합니다' 라고 아뢸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어서 그의 뜻이 우리의 요구대로 변하기를 기대하기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수십 억의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문제로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에 일일이 다 응답하려다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기도의 모범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자신의 뜻으로 흔들림 없이 와 박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이(변하여) 하나님의 뜻에(흔들림 없이) 합치되기를 열망하신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이 당연함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우리의 요구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닮아갑니다. 이게 바로 기도의 위력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도무지 그게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는데 기도하고 기도하다 보니 그게 없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한편으로는 목숨 걸고 덤벼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교회당 뒤쪽에 홀로 앉아 애절하게 기도하던 그 여학생의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 여학생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 기도의 응답 여부는 오직 그 여학생만이 알고 있겠지요.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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